종교
성서의 역사성(06/9/1)
맛있는돌김
2010. 2. 12. 22:42
성서는 역사책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기도 하고 역사적 기록을 하기도 하지만 그 기록의 목적이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을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의 진위유무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말이다. 기독교인들, 그리고 기독교 이전의 유태교도들이 믿는 바 신앙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모든 것이 해석되고 편집되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서에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찾겠다는 것은 영화를 보면서 원작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려고 하는 것과 똑 같다. 원작의 내용을 알려면 원작을 보면 된다. 역사를 정확하게 알려면 역사적 기록들을 열심히 연구해야지 성서를 연구할 필요가 없다. 다만, 성서의 내용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 역사를 연구하기는 한다. 그런데 성서를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역사뿐만 아니라 고고학, 문헌학, 고대어, 고대문화사, 고대 문학, 심지어 과학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이다. 나는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성서에 대해서 학문적 깊이까지 이야기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대충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선에서 성서가 기독교에서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는 소개할 수 있다. 제목대로 성서의 역사성에 대해서 짚어보겠다. 성서의 내용중 적어도 아브라함의 기사 이전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거나 받아들이는 성서학자들은 없다. 역시 전제가 붙는다. 근본주의 신학자들은 여기서 예외다. 아브라함은 역사적 인물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그것도 성서에 나와있는 그대로 그가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근동지역에서 전해내려오는 유명한 족장의 이름일 것으로 판단한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단군 할아버지가 우리 조상이라고 믿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우리 모두가 단군할아버지의 직계후손이 아닌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단군 할아버지 혼자서만 나라를 세웠을리 없으니까)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라고 말하듯이 이스라엘 사람들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는 고대의 한 유명한 부족장을 자기네 조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대다수 성서를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출애굽 이후의 인물들은 역사적 인물들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모세를 비롯해서 그 이후 등장하는 인물들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출애굽기 역시 역사적 정확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 역사가 실제로 일어난 때는 기원전 1200년대이다. 대체로 1250-1270년대 쯤이 아닐까 생각들을 한다. 그런데 그 책이 최종적으로 편집되어 쓰여진 것은 기원전 400년대이다. 무려 80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어떻게 정확한 사실이 전해져 내려왔겠는가! 그래서 엉터리가 많다. 예를 들어서 출애굽한 유대인의 숫자가 남자 장정만(이것은 가장을 말한다) 60만이라고 했다. 남자만 60만이면 어린아이와 여자와 노인들을 합치면 최소한 300만은 된다. 대한민국 국군이 약 60만이라 치면 이 국군이 한 자리에 모여서 출발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훈련받은 군대도 하루만에 출발은 어림도 없다. 일개 대대가 준비해서 출발하는 데도 하루는 걸린다. 그런데 어린아이, 여자들, 노인이 섞인 300만명의 인원이 하룻밤만에 출발해서 출애굽을 시작한다고...? 또 3백만이 사막에서 마실 물만 해도 얼마나 필요할까? 출애굽기에 보면 샘 하나가 터져서 모두가 갈증을 해결했다고 한다. 3백만이면 대구 인구 쯤이 될 터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또 바다를 가르고 지나갔다고 한다. 이건 바다를 가른 것이 아니라 썰물과 밀물의 간만의 차가 큰 지역을 지나간 것이다. 지나간 바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홍해가 아니라 갈대바다라는 곳이다. 홍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 사는 재외교포들을 위해서 희랍어로 번역한 곳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고 히브리어 원문 성서는 모두가 갈대바다라고 표기하고 있다. 지금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갈대바다라고 하는 조그만 만에 해당하는 지역을 간만의 차를 이용해서 급히 건너간 후 물이 다시 들어와서 애굽 군대가 추격을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이렇게 황당한 이야기를 버젓이 썼을까? 그들이 바보들일까? 아니면 사기꾼들일까? 바보나 사기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고 말하듯이 이스라엘 사람들도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출애굽한 민족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신앙고백적으로 그 성서가 쓰여질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숫자인 남자 장정 60만이 출애굽 했다고 고백한 것이다. 즉,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바로 출애굽한 사람들이다 라는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그렇게 기술을 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당시의 문학적 표현법 중에서 그런 표현법들이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추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출애굽기와 그 이후 책들인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모두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보기는 무척 어렵고 기독교 신학자나 교회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서구의 교회는 그런 것들을 다 가르친다. 우리나라도 조금만 신경을 써서 서점에 가보면 이런 내용을 쓴 책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성서에는 역사적인 기록을 한 책들도 있다. 소위 역사서라고 하는 책들이 그것들인데 심지어 이들 책들조차도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아니라고 본다.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신앙적 고백을 찾으려는 노력이 역사적 사실을 희생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구약성서에 열왕기상, 하와 역대상, 하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들은 비슷한 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같은 역사를 두 책이 평행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서로 비교하기 아주 좋은데 이 두 책을 평행비교한 학자들에 의하면 두 책의 신학적 입장이 달라서 내용상 틀린 곳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이 역사서들을 편집한 사람들이 바보여서 한 사건에 대해서 그렇게 서로 다른 내용을 편집해서 넣었을까? 그건 결코 아니다. 그들은 각각의 신학적 의도가 다르기 때문에 둘 다 필요하다고 보고,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신앙고백의 내용이므로 두 책을 다 수록하고 기록했던 것이다. 신앙고백을 싣기 위해서 비단 역사서만 이용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소설도 실었고(요나서와 같은 책) 시을 집대성한 책도 실었으며 심지어 잠언까지 성서로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가진자들을 옹호하고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불의를 계속하면 하느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을 선포한 예언자들의 기록도 성서로 받아들였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 활동을 했다. 예레미야 같은 사람은 불행한 시기를 살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이스라엘의 국력이 비교적 강할 때, 그래서 정치적 종교적 권력자들이 힘 꽤나 쓸 때 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치가 종교지도자들이 타락하고 부패하면 나라가 망하고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외쳤다. 말하자면 지금 미국 같은 나라에서 너희들 이렇게 외국을 침략하고 못된 짓을 하면 곧 망할 거라고 예언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당대에는 콧방귀도 안 뀌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 백년의 세월이 흐른 후 마침내 그들 예언자들의 말이 사실로 이루어진 것을 목격하고서야 그들의 어록들을 집대성해서 예언서란 것을 완성한다. 이렇게 형성된 것이 구약성서이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 역사적 사실을 찾겠다는 것보다 사극 영화 속에서 역사적 진실을 확실하게 파악하겠다는 것보다 훨씬 더 무모한 짓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신약성서는 어떤가? 신약도 구약보다는 낫지만 역사성은 그리 분명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복음서가 쓰여진 연대가 이미 예수 시대를 훨씬 뛰어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쓰여진 마가복음이 50년에 들어서서야 기록되었고 가장 늦게 쓰여진 요한복음은 학자에 따라서 서기 90년에서 108년까지도 올라간다. 지금은 대체로 복음서들이 50년경부터 90년 대 중반기 사이에 쓰여졌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 시대 이후 60년이나 지난 후에 쓰여진 것도 있다는 말이다. 이 때는 이미 교회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후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신앙과 신학적 입장이 성서의 기록에 많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복음서에서도 예수의 행적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완벽하게 찾기란 불가능하다. 단편적으로 예수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제정신 박힌 신학자라면, 그리고 교회 지도자라면 성서가 역사적으로 완벽한 책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근본주의자들이 제정신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은 아니다. 근본주의 신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성서는 역사책도 아니고 더구나 과학책은 아니다. 성서는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내용을 담은 책이고 그들 공동체의 신앙고백적 기록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