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블확정성의 원리와 신의 섭리(06/8/30)
맛있는돌김
2010. 2. 12. 22:36
기왕에 시작한 김에 과학과 신학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먼저, 저 아래 어떤 분이 꼬리글로 올린 말 중에 틀린 것을 지적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분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지식이 대부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오류인 것 같아서 여기서 밝히려고 하는 것이다. 서구에서 처음으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가 카톨릭의 박해를 받아서 처형당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논문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를 완성하고 나서 당시의 학계에는 회람을 시켰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에서도 이미 이 논문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오히려 초기의 분위기는 아주 새로운 흥미로운 학설이어서 도와주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그 책의 출판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을 비롯한 다른 모든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거꾸로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정신병자로 취급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다만 학자들은 논리적 사고가 가능하니까 학자들에게만 논문을 보여주고 일반인을 상대로 한 출판은 미적거렸던 것이다. 그랬는데 주변의 권고와 당시에는 가장 하급의 학문으로 취급받던 기하학이 그런 하급학문이 아니라 진리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상당히 수준높은 학문이라는 것도 알리고 싶은 욕심에 결국 책을 출판하기로 결정게 되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책임을 졌던 오시안더 라는 신부가 그만 자기 멋대로 서문에 이 책은 기하학적 이론을 다룬 책으로 그 심각성이 크지 않은, 심심풀이로 낸 책이라는 투의 말을 써넣음으로써 옥의 티로써 남게 되었다. 하여간 그의 책은 그가 죽기 직전 출판되었고 잠시 자유롭게 유통되다가 카톨릭 내부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급기야 금서로 지정되어서 약 4백년 동안 출판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톨릭이 지동설을 금지한 이유도 당시 종교개혁과 맞물리면서 카톨릭의 권위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상황에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교리마저 틀렸다고 인정할 경우 교회의 권위가 정말 땅에 거꾸로 처박힐 것이라 우려해서 그랬던 것이지 정말 그 이론을 이해 못해서가 아니었다. 역시 정치적 이유가 진리를 십자가에 못박은 또 하나의 사례가 되겠다. 하여간 그래서 갈릴레오도 화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의 이론이 문제가 아니라 카톨릭 교회의 체면이 문제였기에 그가 한 마디 잘못했다는 인정을 함으로써 갈릴레오를 굳이 처형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종교재판 후 로마의 아파트에 연금명령에 따라서 갇혀살아야 했는데 그 갇혀 살았던 아파트가 방이 8갠가 있는 큰 저택이었고 그 저택 안에서 자유롭게 학문활동을 했으면 자기가 쓴 논문을 몰래 빼돌려서 다른 나라에서 출판까지 할 수 있었다. 강철나비 님이 불확정성의 원리를 아인슈타인과 결부시키면서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 불확정성의 원리는 빅뱅 이론과 함께 기독교 신학의 뜨거운 감자였다. 과학적 발전에 과거의 교리를 지키는 데 점점 어려움을 느끼던, 그러면서도 과거의 교리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신학자들 중에는 이 불확정성의 원리가 구세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불확정성의 원리는 독일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1927년에 발견한 법칙이다(발표는 아마도 1930년에 한 것으로 안다). 이 법칙에 의하면 양자 단계의 극미립자는 운동량을 정확하게 측정하려면 운동의 방향이 불확실하게 되고 운동의 방향을 정확하게 측정하려면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이 안된다는 것이다. 즉, 운동의 방향의 정확성 곱하기 운동량의 정확성은 항상 일정한 상수로 나온다는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이 법칙의 발견은 과거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종지부를 찍는 아주 중대한 발견이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의 가장 근원이 되는 양자의 세계에서는 정확한 예측이 안 된다는 것은 물리학자들에게는 참으로 황당한 것이었다. 가장 근원적인 부분에서 예측이 안 된다면 거시적 세계에서도 역시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이 우주의 진화는 사실상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자요동은 과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고 강철나비님 말씀대로 물리학계에 양분을 가져와 20여년 싸움을 했다. 아인슈타인은 나중에 그 때의 자기 입장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큰 오류였다고 할 만큼 중요한 논쟁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불확정성의 원리는 정설로서 인정을 받는다.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을 실험을 통해서 검증을 시도했던 모든 과학자들이 같은 결과를 얻었기 때문에 이젠 아무도 그 이론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양자요동 때문에 우주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양자 요동 때문에 빅뱅 시에 생성된 입자와 반입자의 균형에 1억분의 1이라고 하는 비대칭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서 입자와 반입자가 에너지를 방출하면서 소멸하고 난 후에도 남아 있는 입자가 있어 오늘날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이 되었다는 것이니 이 법칙이 얼마나 중요한 법칙으로 작용했는가! 어쨌거나, 이 불확정성의 법칙은 우주의 진화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신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현대 과학이 우주의 기원을 밝혀감에 따라서 점점 입지에 불안을 느끼던 차에 신의 섭리를 주장할 수 있는 유리한 과학적 이론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 분야의 유력한 신학자가 바로 독일의 판넨베르크로서 그는 양자역학의 이 불확정성에서 바로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확률적 불확실성이 바로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이고 하느님은 애초에 우주를 이렇게 만들어서 물리적 법칙을 위배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의도대로 우주를 섭리해 나갈 길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런 주장은 참으로 아전인수식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이고 그 원리라면 굳이 이런 과학적 법칙의 틈새만 파고들어서 거기서 신의 섭리를 찾을 이유가 없다. 신의 섭리는 우주의 대 법칙이요 우주를 우주답게 하고 지금의 우주가 있게 하고 앞으로의 우주가 존재하게할 원리라고 본다면 신의 섭리는 우리가 바로 이 대자연, 대 우주의 움직임을 존중하고 그 움직임 안에서 조화를 찾아가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굳이 작업가설적 신의 모습, 인격적 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그려 볼려고 그런 과학적 이론의 틈새를 파고들어서 거기에 하느님의 섭리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건 상당히 소아병적 유치함이 엿보인다. 아인슈타인은 하느님은 주사위놀음을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하느님은 정말로 이 우주를 오로지 주사위놀음을 통해서 섭리해 왔고 다스려왔고 그 주사위놀음은 지금도 행해지고 있으며 우리 물질 세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 확률과 주사위놀음은 단순이 양자세계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 우주의 거의 모든 현상과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즉, 카오스의 세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이 주사위놀음을 제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가 풍선을 불 수 있는 것조차 확률적 법칙이 그 경우의 수가 무한히 많음으로써 가능해진다는 것을 생각할 때 주사위놀음은 바로 신의 놀음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지난 주에도 교회에 가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느님, 이 우주적 스케일과 우주적 운행의 질서에서 볼 때 정말 하찮은 존재인 제가 우주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그 법칙에 순응하며 그 법칙의 조화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게 하소서. 우주의 법칙이 되시며 그 조화의 근원이 되시는 하느님의 뜻대로 이 세상이 움직여지며 그 움직임 안에서 우리 인류가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이것이 내 기도였다. 기도란 무엇인가? 내가 그 기도 내용이 이루어지도록 나의 최선을 다해서 그런 삶을 살겠다는 결심의 표현 아닌가! 나는 그렇게 기도했지만 사실 그렇게 살기 어렵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그런 결심을 하고 사는 것과 안 하고 사는 것은 큰 차이가 내 인생에서 날 수 있다고 믿는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신의 섭리가 파고들 틈새가 아니라 신의 섭리가 가장 잘 드러나는, 또는 드러나게 하는 위대한 우주의 법칙인 것이다. |